<작가의 말>을 옮겨 봅니다 :
이 책은 내 친구인 황학주 시인의 강제집행으로 만들어진다. 나는 졌다.
막막한 날들을 견디고 있다. 견디지 못하면 무얼 또 어떻게 하랴. 남은 날들도 결국은 그렇게 견디어 질 것이다.
空文의 경전과 주석서를 읽으면서 여러 계절을 보냈다. 주어와 술어 사이의 아득한 거리를 나는 건너갈 수 없었다. 그 사이사이의 허당에 나는 빠져서 허우적거렸다.
나는 안다. 그것은 살아내야 할 것들을 읽어내려 하는 자의 미망이며 무명이라는 것을. 그 미망 속에서 날이 추워졌으므로 아내는 스무 포기의 배추로 김장을 담갔고 나는 비닐과 스치로폴 몇 조각으로 내 헐거운 삶의 바람구멍을 막았다. 수치스러운 일이지만 나에게는 아직도 배추 몇 포기와 비닐 한 조각이 신비 체험이다.
여기에 모이는 글들은 말과 삶 양쪽에 대하여 모두 어눌한 자의 말더듬의 기록이다. 그것을 묶는 이유는 묶어서 폐기처분하기 위함이다. 나는 다시 출발선상으로 돌아가겠다. 입춘대길.
- 1991.1 김훈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