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아홉 젊은 나이에 출가한 이래 돈은 물론이고 책이나 어떠한 물건에도 초탈한 채 무소유, 무집착, 자비보살의 화현으로 한 평생을 살았던 고암 스님(1899∼1988). 용성 스님의 가르침에 따라 19세에 해인사에서 제산 스님을 은사로 득도해 본격적인 출가수행자의 길에 들어선 스님은 이후 제방선원으로의 운수행각과 치열한 구도행을 이어갔다. 항상 인욕과 자비행을 보였기에 주위에는 법을 청하는 불자들이 끊이지 않았고, 스님 또한 그 누구도 차별하는 법이 없었다. 대중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던 스님은 후학들에게 언제나 좌선 수행은 물론 경전공부도 함께 할 것을 당부했다. 특히 “선을 하더라도 선서를 볼 수 있는 기초 공부는 해야 한다”며 책 읽기를 강조했다. 그렇게 출재가를 막론하고 아버지와 같은 자상함과 강직함을 보일 정도로 수행과 삶이 일여(一如)했던 스님의 덕화에 감응한 후학들은 세 번이나 조계종 종정으로 추대해 가르침을 따르기도 했다. 출가자들이 경율론을 부지런히 익히고, 현대사회와 시대에 비춰 새로운 일반 학문에도 관심을 갖고 섭렵해야 한다며 공부하기를 권했던 스님은 언제 어디에서나 사부대중 모두에게 “신심만 돈독하면 된다”며 불퇴전의 믿음이 계행청정과 자비실현의 근간이 될 수 있음을 역설했다. 그렇게 불교와 사부대중을 항상 내 몸처럼 아끼고 사랑했던 자비보살 고암 스님은 1988년 10월25일 오후 8시 가야산 해인사 용탑선원에서 “조심해서 살거라. 인과응보는 분명하니라”라는 말을 남기고 열반에 들었다. 스님의 법을 따르는 문도들은 지난해 법어록 출간에 이어 열반 24주기를 맞아 곳곳에 흩어진 사진을 모아 영첩(影帖) ‘자비, 멀리서 가까이서’를 발간했다. 오직 발우와 가사 한 벌로 승가의 본분을 삼고, 버리고 또 버리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았던 고암 스님의 미소법문을 접할 수 있는 기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