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바람 천리 길을 은일자 찾아와(秋風千里訪幽人)/한나절 매화 핀 창가에서 웃음꽃 피었네(半日梅窓笑語親)/나 또한 안개 낀 강가에서 낚시대 드리우고(我亦烟江垂釣者) /백구와 대하는 게 진귀하다오(白鷗相對自爲珍).`

16세기 초서의 대가 고산(孤山) 황기로(1521~1567)의 시(詩) 구절이다.

이 구절을 포함한 네 편의 시인 `시고4수(詩稿四首)`는 지난해 보물로 지정된 옛 글씨다. 유려한 글씨 끝에는 `고산방학정 주인의 서`라는 낙관이 분명하게 찍혀 있어 서화의 가치를 더한다. 겸재 정선이 우리 회화사의 `화성(畵聖.그림의 성인)`이라면, 고산은 `초성(草聖)`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탄은 이정(1541~1622)의 `니금세죽` 그림은 가장 먼저 관람객을 맞이하는 작품이다. 이 역시 고산의 글씨와 함께 임진왜란 전 작품으로 보기 드문 희귀작이다. 금가루를 아교로 갠 고급스러운 재료인 `니금`이라는 재료를 통해 고매한 기품이 한껏 배어나온다.

유홍준 명지대 교수(전 문화재청장)는 "탄은의 대나무 그림은 당시 국제무대에 나가서도 뒤지지 않았을 만큼 명작"이라며 "왕손(세종대왕 현손)다운 기품이 그림에 고스란히 투영되고 있다"고 평했다.

조선 후기 미술을 빛낸 기라성같은 대가 33명의 그림 48점이 한자리에 모였다. 한국화 전문 화랑인 동산방화랑(서울 견지동)은 15일부터 `옛 그림에의 향수`라는 조선후기 회화전을 연다. 겸재 정선과 공재 윤두서, 현재 심사정, 단원 김홍도, 초원 이수민 등 대가의 작품을 책이 아닌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는 보기 드문 기회다. 작품 장르 역시 산수와 인물 풍속 화조 사군자 등 다양하게 구성돼 한국화의 높은 품격을 경험할 수 있다.

박우홍 동산방 대표는 "옛 고서화는 수량이 한정돼 있고 소장자들이 공개를 꺼려 전시를 열기가 쉽지 않다"며 "이번 전시는 학생들과 일반인들이 옛 그림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말했다.

고미술품 전시는 간송미술관이 일 년에 두 차례 여는 전시나 삼성미술관 리움의 전시가 고작인 현실이다. 특히 박물관에서 기획하는 전시는 대개 알려진 작품들인데 비해 이번 전시는 미공개 작품이 주를 이룬다.

실제 고서화는 임진왜란을 거치며 불에 타거나 물에 젖어 사라진 경우도 많지만 도자기는 땅에 묻을 수 있어 수량이 상대적으로 많이 남은 편이다.

겸재 정선의 `부아암`은 청와대 뒷산인 북악산 정상 가까이 산등성이에 있는 바위를 그린 것으로 아기를 등에 업은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부아암(負兒巖)이라는 이름을 얻엇다.

국보 `자화상`으로 유명한 공재 윤도서의 작품 `주감주마`는 그가 인물뿐만 아니라 말을 그리는 데서도 얼마나 정밀한 묘사에 치중했는지 알 수 있다.

단원 김홍도의 `게`그림은 단원의 생동감 넘치는 필치가 돋보이는 작품으로 꼽힌다. 이병직의 소장인이 찍혀 있으며 1938년 경매에도 출품됐던 작품이다.

전시 기획에 도움을 준 유홍준 교수는 "전시작 가운데 초원 이수민의 `강선독조`와 이인문의 `수간모옥`은 우리 선인들의 조촐한 멋을 잘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다산 정약용과 추사 김정희를 비롯한 서예 작품들도 전시회의 품격을 한층 높여 준다.

동산방 화랑에서 이번에 여는 전시는 1983년 조선 후기 회화 83점으로 열었던 `조선시대 후기 회화`전에 이어 28년만에 여는 것이다.

화랑에서 소장하고 있는 작품에 개인 소장자들로부터 빌린 작품으로 전시를 연다. 다만 단원과 함께 조선 풍속화의 쌍벽을 이뤘던 혜원 신윤복의 그림을 한 점도 볼 수 없어 아쉬움을 남긴다.

전시는 15일부터 28일까지. 관람료는 무료. 02)733~5877